[전선114호] 터키가 지원하던 시리아반군들을 위해 촛불을 들었던 그 손들은 지금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가?


터키가 지원하던 시리아 반군들을 위해 촛불을 들었던 그 손들은 지금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가?

서의윤 훗 출판사


1. 성명서와 침묵

터키의 시리아 침략 및 쿠르드 인종 청소를 규탄한다.

10 9일 터키는 시리아의 북동부에 있는 쿠르드 지역을 침략했다. 터키는 시리아에서 일어난 오랜 대리전 동안 테러집단인 반군 세력들을 지원하여 시리아의 주권을 침해하고 세계 평화에 거스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시리아의 주권을 능멸하여 엄밀히 정부가 있는 시리아의 국경을 넘어 침공을 감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터키는 그 동안 터키 내 쿠르드인들 및 친쿠르드 세력에 대한 탄압을 자행해놓고도 부족하여 전례 없던 직접민주주의와 여성 해방을 향해 나아가던 시리아 쿠르드의 뿌리마저 뽑으려고 하고 있다. 터키가 테러리스트로 규정한 쿠르드족, 특히 압둘라 외잘란[1]의 발자취를 좇는 터키와 시리아의 쿠르드족이 무엇을 추구하였는가? 그들은 기존의 국민국가와 그 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자신들의 기본적인 인권과 민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민주적 연합체주의를 내세우고 무력저항을 그만 둔 상태이다. 또한 다에쉬(IS)[2]와의 기나긴 싸움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이 보여주지 못 했던 전투력과 의지를 가지고 세계 평화에 크게 기여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르도안이 이끄는 터키의 공안 정부는 시리아에 정부가 안정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 시리아의 쿠르드족을 다시금 테러 세력으로 왜곡하여 자신들의 악의적인 침략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터키가 두려워하는 것은 민주주의 혁명을 일으킨 쿠르드족의 영향이 점점 퍼져나가는 것이고 더 이상 자력으로는 지속 불가능한 국내 공안 정권이 흔들리는 것이며, 그래서 자신들의 더러운 손가락을 쿠르드를 향해 겨눔으로써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고 지역 내 패권을 장악하려는 중이다.
한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는 제국주의와 파시즘을 향해가는 터키의 발을 막고 그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국내 대표적인 평화운동 단체들은 이상하리만치 목소리가 없다. 이들이 2018 3 22일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를 앞세워서 시리아에서의 민간인 학살 중단과 전쟁 종식을 촉구하는 촛불 집회라는 이름으로 연대체를 맺고 활발하게 활동하던 때와는 사뭇 다르다[3].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리나라 평화단체들이 국제 정세를 판단하는 기준과 능력이 서구 미디어 중심주의와 당사자주의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2018년 당시 국내 평화단체들이 입을 모아 말했던 시리아 민간인은 정확히 말해서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 동쪽에 있는 동구타(Eastern Ghouta)를 거점으로 하고 있던 화이트헬멧 등 자칭 민간 엔지오를 포함한 시리아 반군들이었고 그들이 비난했던 대상은 시리아 정부군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시리아 반군은 혁신과 저항의 상징이었던 반면, 시리아 정부는 화학무기까지 사용하여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한 극악무도한 정권이었다[4].
그러한 관점을 이끌고 있던 두 축은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와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리아인인 압둘 와합이 사무국장으로 있는 단체, 헬프시리아였다. 일례로 2019년에도 강원도 평창에서 베터투게더챌린지 2019가 열렸을 때 압둘 와합은 화이트헬멧의 대표인 라에드 알살레의 내한과 행사 참여에 적극 관여했다. 여기에서도 역시 반군에 해당하는 화이트헬멧은 목숨을 걸고 긴급 구조 활동을 펼치는 민간 영웅들이며 전쟁 현장에서 자생적으로 피어난 민중들이라는 이름의 꽃이었다. 이는 화이트헬멧을 시리아의 독재 정부에 대항하는 민간 구조 단체로 규정하는 서구 언론과 엔지오들의 주장을 압둘 와합이라는 시리아인이라는 당사자가 증언의 형태로 그 내용을 보증하는 캠페인과 이벤트로 기정사실화해왔다.

2. 국내 평화운동의 문제1 - 협소한 당사자주의에 함몰된 일방적인 목소리

당사자주의는 주로 장애 운동에서 얘기되어 온 말로, 지금은 인권을 침해 받은 당사자들이 그 직접적인 경험을 근거로 하는 정서를 공유하고, 스스로를 호명하면서 정치 세력화 되고, 그 결과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자기 대표성을 획득하는 일련의 과정과 거기에 힘을 싣는 목소리를 가리킨다. 당사자주의는 부문운동과 정체성 정치가 시민 사회의 최전선에 등장하면서 함께 힘을 얻고 있다. ‘헬프시리아의 압둘 와합은 시리아인당사자라는 입장을 가지고 국내 한 신문에서 상당한 기간 동안 지면을 할당 받아 연재를 해 왔다. 앞서 언급했던 바대로 국내 평화운동 단체들이 시리아 문제에 관해 선택한 입장은 바로 서구 주류 미디어의 주장을 시리아인당사자로서 한국에서 증폭시키고 있는 그가 말하는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성은 때로는 다른 당사자성과 충돌하며 때로는 보편적인 가치보다 근거 없이 우선시 되기도 한다는 문제가 있다. 같은 시리안인으로서 그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를 내는 또 다른 당사자들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일례로 마크 탈리아노Mark Taliano는 시리아 민중에 의해 선거로 뽑힌 아사드 정권을 지지하며 이슬람 극단주의인 와하비즘에 반대하고 우리가 흔히 언론을 통해 시리아 내전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은 패권들 사이의 대리전임을 주장하는 시리아인 당사자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있다.[5] 이렇듯 당사자의 목소리에는 다양하고 종종 서로 모순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전선기자 정문태는 난민 입을 빌린 전선뉴스를 다루는 데에 대한 주의사항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건 매솟(Mae Sot)이나 매사리앙(Mae Sariang) 같은 타이 국경도시에 진치고 있던 외신들이 난민 입을 빌리거나, 아니면 타이 군부가 흘리는 다분히 정치적인 정보들을 취합해 뉴스를 날렸던 탓이다, 전선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외신들이 그려댄 전황보도를 뒤늦게 접한 나는 크게 놀랐다. 그날 그 놀람으로부터 나는이빨을 통한 간접취재, 특히 난민 입을 빌린전선뉴스를 절대 기사로 다루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전선이라는 특수한 현장을 확보하기 힘든 기자들 처지에서는 난민들을 값진 정보제공자라 여기기 쉬운데, 사실은 난민들이 들고 나올 수 있는 정보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걸 나는 버마전선에서 배웠다. 난민들은 어떤 대상으로부터 공격 당할가능성을 읽고 서둘러 현장을 빠져나오는 이들이기 때문에 실제 전선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다. 또 전선을 읽을 만한 전문적인 눈도 없다. 따라서 난민들 전언은 전황 보도에서 '가상 재료일 수밖에 없다. 참고 거리 정도라는 뜻이다:. 전황 취재와 난민실태 취재는 명백히 다른 분야다. 더욱이 난민들은 심리적 공황상태에서 공격자들에 대한 적개심에다 소문과 상상력을 덧붙여 증언하는 공통점을 지녔다: 예컨대 난민들 증언을 따른다면, 1999년 코소보전쟁 때 학살당한 주민 수가 코소보 전체 인구와 맞먹고 또 거의 모든 여성들이 조직적인 성폭행을 당한 꼴이 되고 만다.[6]

난민들의 주장을 전면 부정하자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전선보도에서 난민들의 증언에 대해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기사들의 불문율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을 뿐이다.[7] 그리고 가장 상식적인 선에서도 생각해보자. 한국에서 시리아인이라는 당사자의 목소리로는 화이트헬멧을 한국에 초청한 압둘 와합이라는 아랍계 시리아인 한 개인의 주장만이 들리고, 다에쉬가 주축인 이슬람 근본주의자인 반군을 혐오하는 아랍계 시리아 시민과 다에쉬 격퇴에 가장 큰 공을 세우고 로자바 혁명을 주도한 아프린에 있는 시리아 쿠르드인들의 목소리는 당사자로서 인정을 못 받고 있는 것이 너무나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3. 국내 평화운동의 문제2 - 서구의 권위라는 안전지대에 한정된 목소리

또한 서구 미디어나 서구 국제단체의 시각을 따르는 것은 국제관계 분야에서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활동하는 데 도움이 된다. 중동을 포함한 아시아, 아프리카나 국제 분쟁에 관한 연구도 영국 소아스(SOAS)나 우드로 윌슨 공공국제정책대학원(Woodrow Wilson School of Public and International Affairs) 등 서구권 학계가 현지보다 많은 자료와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중심 담론을 생산해내고 있다. 국제 연대나 평화운동에서도 특히 국제앰네스티를 비롯한 서구 단체들의 시각과 활동이 표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국제 뉴스를 들여올 때도 BBC CNN 등은 여과 없이 받아들이지만 RT를 비롯하여 그와는 정 반대의 입장을 전하는 언론의 목소리는 철저히 묻혀 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시리아에 대해서도 독재 정권 대 저항하는 민중이라는 서구적인 프레임이 어쩔 수 없이 작동한다. 그러나 이들은 첫째로 왜 사우디아라비아 등 철저한 독재이자 야만적인 친서구 정권들에는 같은 잣대가 적용되지 않는지에 대답하지 못 하고, 둘째로 어떻게 해서 시리아의 민주적인 반정부 시위에 대규모의 화력이 지원되었는지에 대답하지 못 한다. 그저 지금, 여기, 독재 정권(으로 보이는 것)과 저항하는 민중(이라고 주장하는 세력) 사이의 명명백백한 투쟁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독재와 민중이라는, 서구 담론이 제시한 프레임에 갇혀 있던 자칭 진보적인 세력은 그 결과 리비아의 가다피 정권이 무너지면서 드러난 미국의 야욕과 유럽으로 가는 관문이 뚫리면서 일어나게 된 혼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왜 그 독재와 민중이라는 프레임이 유독 중동의 강자였던 이라크와 시리아에 순차적으로 적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시리아에 대해서도 동일한 서구의 프레임이 어쩔 수 없이 작동하는 것은, 그들의 입장을 그대로 따라가면 편할 뿐만 아니라 주류 미디어로부터 비판 받을 여지가 거의 없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저 서구 미디어가 배포하는 내용을 보도지침으로 하여 판결을 내리면 된다. 또한 이들은 서구 자유주의를 기준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며, 그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을 판단의 오류이기보다는 도덕적인 결함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1948년 이스라엘이 만들어지면서 생긴 최초의 난민들과 빼앗긴 땅에 대한 권리를 외치며 현재 이스라엘이 국경을 관리하고 있는 지역을 온전히 팔레스타인으로 여기는 저항 세력이 있지만, 서구 중심의 담론에서는 1967년 점령된 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으로 팔레스타인에 대한 담론이 한정되어 있다. 1948년을 언급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주의에 따라서 용납이 안 되는 일이며 개인의 권리라는 절대가치를 손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하고 결함 없는 판관의 역할을 하고 앉아만 있기에는 국제 정세는 너무 복잡하고, 판관이 쉽게 무시해버리는 현실을 삶으로 사는 사람들의 고통은 너무도 크다. 1993년 오슬로 협정에서도 끝내 결론이 나지 않았던 최종 문제 중 하나가 바로 난민의 귀환권 문제였으며 그 핵심에는 1948년 난민들이라는 또 다른 개개인들의 생생한 삶이 놓여 있다.
만약 현실에 대한 확고한 이해와 충분히 과학적인 사상이 있다면 때로는 안전한 담론의 범위 안에 머물기 보다는 서구 미디어의 시각을 넘어서서 국제 관계의 정황과 맥락을 과감하게 짚는 시도를 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과연 그들은 독재에 맞서 싸우는 민중이자 저항 세력인 것일까? 현실 속 국제 정세의 맥락에서 우리는 화이트헬멧으로 가장 잘 대표되는 시리아 반군 세력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2018 7월 영국 BBC는 기사를 통해 시리아 남서부 반군 장악 지역의 화이트헬멧이 이스라엘 방위군(IDF)의 비호 아래 골란 고원을 통해 요르단으로 이동했다고 쓰고 있다[8]. 물론 이 기사는 이스라엘 측의 입을 빌어 이것이 완전히 인도주의적인 노력이었다라고 주장한다. 공식적으로 시리아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정규 군대가 점령 상태인 골란 고원을 통과해서 수행한 작전이었는데도 말인가? 다른 나라도 아닌 이스라엘이? 터키 에르도안 정권 또한 시리아 아사드 정권에 극히 반대하여 카타르 및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알카에다 시리아 지부인 알누스라 전선 및 기타 이슬람 극단주의 분파들을 지원해왔다[9]. 국내 평화운동 단체들은 아프린에 대한 터키의 공격과 동구타의 반군에 대한 시리아 정부군의 공격을 같은 살상행위라고 주장하며 동시에 비난하면서 자신들이 말하고 있는 그 점들이 어떻게 이어지는 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4. 폭력적인 제국주의 야욕에 맞서는 국제주의 연대의 가능성

다시 터키의 시리아 침략 문제로 돌아오자. 현재 터키 정부를 이끌고 있는 에르도안은 국내적으로는 공안 정국을 유지하고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의 추구를 목표로 하는 듯한 행보를 보인다. 에르도안은 2016년 쿠테타 시도를 빌미로 국내 경쟁자 및 반대자들을 솎아냈고 그 이후로 왜 인지 서방의 제재를 받지 않은 채로 소위 말하는 독재의 길을 걸어왔다. 2019년 선거에서 이스탄불을 내주게 되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재선거를 밀어붙였다. 결국 재선에서도 야당인 공화인민당(CHP)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었으나 그 이후에도 금리 인하 요구를 따르지 않은 중앙은행 총재를 경질하는 등 제멋대로인 행보를 이어갔다. 또한 키프로스 북부 지역에 전 세계에서 터키만이 그 존재를 인정하는 북키프로스(북키프로스튀르크공화국)을 두고서, 천연가스가 나는 그 지역을 실질적으로 무단 점거 하며 분쟁을 부르고 있다[10]. 그러나 무엇보다 터키의 목표는 쿠르드 민병대인 인민수비대(YPG)를 포함한 시리아의 쿠르드족이다. 터키가 집안을 단속하며 내부 결속을 꾀하면서 제국주의의 야욕을 꾀할 수 있는 첫 단계는 언제나 쿠르드를 테러집단으로 규정하고 그들에 대한 억압과 공격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엄연히 정부가 있는 한 나라의 국경을 제멋대로 유린한 것이다.
쿠르드족에 대한 터키의 탄압은 악명 높다. 터키 쿠르드의 지도자인 압둘라 외잘란은 기존의 국민국가와 국경을 지키면서도 쿠르드족과 터키 국가가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해법으로 민주적 연합체주의[11]를 제시하고 무장 투쟁을 중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터키 정부에 의해 납치되어 임랄리라는 이름의 섬에 있는 감옥에서 20년째 독방에 감금된 채 변호사를 만나기도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시리아의 쿠르드족은 외잘란의 사상을 여전히 교본으로 사용하면서 지역의 독버섯 같은 존재였던 다에쉬와 맞서 전투적으로 싸웠고, 동시에 직접 민주주의와 여성해방이라는 새로운 사회를 시도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미국에게 협력하여 다에쉬를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뿐만 아니라 유럽 등지의 본국에서 거부한 다에쉬 포로와 가족들을 수용하는 일도 떠 맡았다. 그러나 미군은 철수했고 터키는 곧장 시리아 국경을 넘어 시리아 쿠르드에 대한 공격을 자행했다.
터키의 에르도안 정권은 시리아의 쿠르드가 강조하는 직접 민주주의와 여성 해방 등 공존 가능한 새 세상이라는 혁명을 뿌리째 뽑아내려고 하고 있다. 겨우 가라 앉은 이 지역을 들쑤셔서 다시 혼란을 일으키고 그것을 틈타 사욕에 따른 장기 집권을 꾀하고 있다. 그리고 터키 내의 이슬람주의자들을 부추겨서 보다 보수적이고 통제 가능한 사회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 터키는 시리아 침략에 대해 비판하면 터키 내 시리아 난민 360만명을 유럽으로 보내버리겠다고 협박한다[12]. 터키가 계속 시리아의 쿠르드족과 그 지역을 유린하면 시리아 쿠르드가 떠 안고 있던 다에쉬 포로들과 그 세력들의 손을 묶은 포승줄이 풀리게 된다[13]. 그러나 터키의 군사적 침략을 비판하면 터키에 있던, 다에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반군 성향의 사람들을 포함한 엄청난 수의 난민들이 대거 유럽으로 유입될 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 사회는 터키에게 무기 판매를 일시 중지하거나 터키의 시리아 침공을 중지시키기 위한 회담 등을 제안하는 등의 소극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다[14]. 세계는 터키의 무모한 움직임에 따라 로데오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지금이야말로 각국의 풀뿌리 평화단체들이 들고 일어나 터키와 시리아에 있는 쿠르드와의 연대를 보여주고 표면에서 맴돌지 않고 좀 더 지속적이고 성숙한 국제연대 및 교류 활동을 해야 할 시기이다. 터키와 시리아의 쿠르드인들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해결책으로 무엇을 고민했으며 어떤 노력을 했던가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상을 때로는 지지하고 퍼트리면서 세계인들의 시각을 변화시키기 위한 장기적인 투쟁을 해야 한다. 하지만 국제앰네스티 등은 터키의 시리아 침공에 대해 입을 대기 전에 과거 화이트헬멧을 지지했던 그 입장을 제대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번복하는 단계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1] 터키 쿠르드의 정치 지도자로, 기존의 국민 국가와 국경을 반대하지 않는민주적 연합체주의를 만들자는 새로운 정치적 해법을 제시하였다. 또한여성의 자유가 고국의 자유보다 소중하다고 주장한 최초의 민족해방 지도자로, 이 기조로 인해 터키와 시리아의 쿠르드 사회에서는 여성 전사들의 눈부신 활약이 돋보이게 되었다. 외잘란은 현재 터키 정부에 의해서 19년째 임랄리섬의 감옥에 있는 독방에 감금된 상태이다. 그에게는 한 번에 책 한 권씩만이 허용되며 함께 논의하고 정리할 동료조차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잘란은 19년의 독방 생활 중 수십 권의 저서를 냈다.(알라딘 저자 소개)
[2]이슬람 국가라고도 부르는 이슬람 극단주의자 집단으로 이라크와 시리아에 걸친 지역을 기반으로 전 세계를 광기 어린 테러의 공포에 몰아 넣었다. 이슬람 국가는 다에쉬가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이며 이슬람에 대한 모독이자 다에쉬에 대한 과대평가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IS가 아닌 다에쉬라는 말을 썼다.
[3] https://www.peoplepower21.org/Peace/1555109
[4] 시리아: 사라케브 지역의 불법 화학무기 공격 정황 드러나, 2018.2.19 https://amnesty.or.kr/24307/
[5] Mark Taliano, I am a Syrian Living in Syria: “It Was Never a Revolution Nor a Civil War. The Terrorists Are Sent by Your Government” Global Research 9 September 2016. 마크 탈리아노가 쓴 Voices from Syria는 수 년에 걸쳐 현지에서 목격한 바를 분석한 책으로 시리아 관련된 책들 중 중요한 책으로 손꼽히고 있다.

[6] 정문태(2004) - 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16년의 기록. 한겨레신문사 p.100.
[7]
[8] https://www.bbc.com/news/world-middle-east-44915099
[9] https://www.rt.com/news/334483-turkey-nusra-ypg-exclusive/
[10] http://www.e2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8053
[11] 압둘라 외잘란; 정호영 옮김(2018), 압둘라 외잘란의 정치 사상, . 최원형, 2018.4.12.‘독립 국아닌민주주의요구하는 쿠르드 사상가, 한겨레신문. 현재 터키의 시리아 침략 관련해서 알려면 쿠르드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한겨레 최원형 기자가 쿠르드와 상황과 압둘라 외잘란의 사상에 대해서 정말 간결하게 잘 전달하고 있다. 이 글은 서평을 넘어서서 그 자체로 독자적인 가치가 있는 글이다.
[12] 터키 에르도안 "군사작전 비판하면 난민 360만명 유럽 보낼 것", 2019.10.10 https://www.yna.co.kr/view/AKR20191010186600108?fbclid=IwAR0YaRtHXf04PAyPCxN7ZbIGYjk0IV5uvfLisrPLfTwOslCUcvwzq6BYU_A
[세계의 분쟁지역] 쿠르드 배신한 트럼프… “IS 부활우려가 현실로, 2019.10.11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10111434029975?fbclid=IwAR0XJ5_WJ3obMMkVgwzPoGpmY4EqBxfAaSa9gC9p6qG6_Fsj3yysjP0MAl4
[14] Iran offers to mediate between Syrian Kurds, Turkey, 2019.10.12 https://www.reuters.com/article/us-syria-security-turkey-usa-iran/iran-offers-to-mediate-between-syrian-kurds-turkey-idUSKBN1WR07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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