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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115호] 단위 사업장을 넘어 전국적 계급적 단결로 자본과 국가권력에 대한 투쟁으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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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 사업장을 넘어 전국적 계급적 단결로 자본과 국가권력에 대한 투쟁으로 나아가자. 『신년사』 현장실천 사회변혁 노동자전선 운영위원회 2019년은, 계급으로 갈가리 짖겨진 이 사회에서 노동자·민중들의 분노와 저항이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공연한 계급간의 전쟁으로 점철되어왔던 한 해였습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 요금 수납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직접고용 쟁취 투쟁, 청년노동자 故 김용균의 죽음으로 촉발된 죽음의 외주화반대와 비정규직철폐 투쟁, 자본과 문재인 정권의 사회적 합의주의에 결사적 저항 투쟁, 민주노총의 경사노위의 참여 방침에 맞선 투쟁, 해고 공무원·교사 노동자들의 복직 투쟁, 노조 탄압·파괴에 맞서 기나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유성 투쟁, 영남대 의료원의 박문진 동지를 비롯하여 곳곳에서 목숨을 건 고공농성 등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사회는 가진 것이 없는 이들에게는 아비규환의 세상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집이 없는 이들에게 집값이 갈수록 칫솟고 있으며, 현장에서는 자본에 의한 구조조정이 계속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청년 실업률은 고공행진을 하고 있습니다. 생활고를 비관해 자살하는 일가족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쪽에서는 소수의 가진 자들이 가진 부를 주체할 수 없어 어쩔 줄을 모르는 세상입니다. 이는 자본이 자기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낸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세상, 즉 자본의 이윤추구가 유일한 목적인 세상,이 그치지 않는 한, 이 사회의 대다수인 노동자·민중의 생존권은 항시적으로 위협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노동자·민중은 이윤중심의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하기 위하여 계속적인 저항과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노동자들이 이 사회의 모든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여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의 실재적 주인이 노동자국가 건설을 통해 실질적인 주인행세를 하기 위한 것입니다. 노동자국가를 위한 실질적인 준비는 이미 되어 있습니다. 이 사

[전선115호] 일상과 환상에 매몰되지 않는 이론과 실천 『세계사회주의운동사』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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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환상에 매몰되지 않는 이론과 실천 『세계사회주의운동사』서평 서의윤 노동전선회원 1. 의의 운동을 하면서 때로는 서로 다른 사상적 배경들이 언어를 통해 설전으로 오고가기도 하지만 실천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상황에 접근하고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충돌이 일어나기도 한다. 소련 붕괴 이후 현실에 대한 전망이 충격을 받으면서 그러한 실천적인 측면들이 모호해지거나 불신을 받게 되었다. 계급투쟁이나 맑스-레닌주의가 힘을 잃어가면서, 세계 전체를 보지 못하고 표면적인 부분에 주로 매몰되는 정체성 정치 등이 빠르게 세력을 확장해갈 수 있었던 것에도 일부 그러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또한 사상이 삶이라기보다는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인 의복이나 악세사리처럼 된 오늘 날, 많은 젊은이들이 당이나 시민 사회에서 소속감을 찾지 못 하고 아나키스트적인 입장에 서고 있다. 많은 진보적 사람들이 권력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은 운동의 목표에서 ‘권력을 잡는 것’을 제외시킨다. 그리고 모든 정세에서 권력과 질서에 대해 일단 의심과 불신을 보낸다. 반동적이든 아니든 그 성격과 상관없이 권력에 대한 저항은 매력적인 것, 보다 더 심각하게는 옳고 정당한 것이 되었다. 권력과 체제에 대한 긍정적인 분석은 개량으로 취급되면서도 막상 계급투쟁은 희미해지고 표면적인 호불호가 난무하는 것은 서글픈 모순을 보여준다. 우리 시대의, 혹은 미래의 혁명은 너무도 소원하다. 하지만 과거의 혁명은 시대의 흐름과 함께 하는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혁명과 사상투쟁을 돌아봄으로써 앞으로 전개될 흐름과 그 맥락 속에 등장할, 혹은 등장해야하는 혁명을 구체적으로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크고 작은 국내외 문제들과 안건에 대한 분석의 기준을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W. Z. 포스터가 지은 세계사회주의운동사(도서출판 동녘, 편집부 옮김, 1988)는 건조한 서술로 정보를 주는 데 멈추지 않고 현장감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생동감을 주는 책으로

[전선115호] 강남역 철탑위에 사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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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철탑위에 사람이 있습니다.  삼성은 무노조경영 피해자인 김용희, 이재용 해고노동자에게 사과하고 명예복직 실시하라 이종란 반올림 상임활동가 24년이란 세월은 한 사람의 삶에서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성인이 되는 긴 시간이다. 누군가에게 24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묻는다면 제대로 기억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잊혀지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전쟁이나 폭력과 같이 잔인한 일을 겪은 이들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기억을 잊지 못한다. 트라우마가 되어 일상을 잠식한다. 강남역 사거리에 있는 0.5평 밖에 안 되는 좁은 CCTV 철탑위에 24년 전에 삼성으로부터 해고된 노동자 김용희 님이 농성중이다. 그는 악명 높은 삼성 무노조경영 피해자이다. 24년 전에 겪었던 납치, 폭력, 가족 괴롭힘, 간첩누명, 구속, 해고의 기억은 몸에 각인되었고 일상의 삶을 지배해버렸다. 김용희 님은 60세 정년을 맞이한 올해 6월 10일 철탑을 택했다. 그와 한두해 전부터 같이 투쟁을 해 온, 동갑내기 삼성중공업 해고노동자 이재용 님(86년 입사, 노조설립과정에서 97년 해고)은 철탑 밑에서 천막농성을 하면서 김용희 님에게 음식을 올려주고 지상과의 연결을 담당하고 있다. 20여년전에 해고된 두 해고노동자가 삼성에게 사과와 명예복직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는 것이다. 김용희 님은 삼성시계에서 노동조합 설립을 시도한다는 이유로 갖은 탄압 끝에 91년 해고되었다. 그의 해고사유는 조작되었다. 대법원 상고심 결심공판을 앞두고, 해고사유 조작이 밝혀질 위기에 처하자 1994년 삼성그룹 비서실 및 삼성시계는 상고심 취하를 대가로 복직을 약속했지만, 원직이 아닌 삼성건설(현 삼성물산 소속) 러시아 스몰렌스크 지부로 발령을 보냈다. 거기서 1년간 근무하면 원직에 복직을 시켜준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러시아에서 김용희 님은 폭행을 당하며 중요한 증거자료를 빼앗겼고 심지어 간첩으로 내몰려 신고를 당했다. 95년 한국으로 간신히 돌아

[전선115호] ILO 핵심 협약 비준과 노동법 개정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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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O 핵심 협약 비준과 노동법 개정의 의미 지난 10월 1일 문재인 정권은 ILO핵심 협약인 ‘결사의 자유 협약’ 비준을 추진하면서 해당 협약에 부합하는 내용으로 관련 법률을 개정해야 한다며 노동관계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이후 노동조합법, 교원노조법, 공무원 노조법 등 개정안은 곧 바로 10월 4일 국회 의안 정부시스템에 등록 되었다. 이에 민주노총 등 노동조합 운동 진영은 관련 법안들이 노동조건을 후퇴 시키는 ‘노동법 개악’임을 분명히 하면서 이를 저지하기 위한 총력 투쟁을 선언했다. 문재인 정권의 노동법 개정안 국무회의 의결 이후 비록 민주노총이 개악으로 규정을 했지만 여전히 현장에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특히 해당 사업장의 노동자라 할 수 있는 교원·공무원 노동자들의 경우 이러한 혼란이 더욱 더 큰 것 또한 사실이다. “비록 노동법이 약간의 후퇴를 가지오더라도 ILO 혁심 협약이 비준되니까 필요한 것은 아닐까?” “당장은 어렵지만 수년간 법외노조로 존재했던 전교조 등 교원 공무원 노동자들이 합법 노조가 되니까 그나마 괜찮은 것 아닐까?” 문재인 정권의 ILO 핵심 협약인 ‘결사의 자유 협약’ 비준을 둘러싸고 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문제는 이러한 현장의 혼란이 민주노총의 노동법 개악 저지 투쟁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 조직적 역량을 동원하여 총력을 기울여 투쟁을 해도 저지가 쉽지 만은 않은 상황에서 현장의 투쟁 동력이 모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은 한국 노동자 계급에게는 매우 불리한 내부의 조건인 셈이다. 과연, 지난 10월 1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ILO 핵심 협약 비준과 노동법 개정(?)의 내용이 무엇인가? 현장에서 나오고 있듯이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민주노총이 총력 투쟁을 통해 저지할 만큼은 개악이 아닌(?) 내용인가? 우리는 ILO 핵심협약 비준과 노동법 개정(?)에 대한 본질을 분명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현실에 대한 객관적 분석 뿐 아니라 민주

[전선115호] 포스트모던적 사고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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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적 사고 비판 이성우(전교조 교사) 인간 사고의 발전은 변증법적으로 이루어진다. 개인 사고의 발전도 그러하고 인류 정신사의 발전도 그러하다. 70년대 말에 생겨난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용어에서 보듯이 모더니즘에 대한 반대를 기치로 내건다. 모더니즘 사상은 계몽주의로 대변되는데, 이는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을 골자로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을 중시하는 모더니즘에 반대하여 감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이성을 중요시하는 자세 자체가 문제 될 수는 없다. 이성 못지않게 감성도 중요하다는 포스트모던적 사고 또한 이성이 작동한 결과가 아닌가? 물론, 포스트모던이 강조하는 바는 (이성, 감성), (거대담론-미시담론)의 대립쌍에서 모더니즘이 전자를 지나치게 중요시했다는 비판이다. 그래서 이들은 ‘다양성’ 혹은 ‘차이’를 화두로 내걸면서 ‘자율성’이나 ‘젠더’ 혹은 ‘섹슈얼리티’ 따위의 이슈를 전면에 내세운다. 모더니즘 시대에는 여성의 문제가 계급의 문제에 가려져 소외되었다거나, 피부색이나 성적 취향에 따른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누구나 인정을 할 바다. 새로운 생각 혹은 사조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좋다. 하지만, 새로운 무엇을 받아들이면서 기존의 무엇 속에 있는 가치를 깡그리 무시하는 것은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기까지 던져버리는 우를 범하게 된다. 모든 사고는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 할 때 ‘변증법적dialectical’의 의미는 “부정의 부정negation of negation”을 거쳐 발전한다는 것이다. 유념할 것은, 변증법적 부정은 독일어로 ‘Aufheben’인데, 이 낱말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점이다 – 1)부정negation 2)보존reservation 3)고양elevation. 기존의 것에 내재한 장점의 보존 없이 맹목적인 부정을 지향하는 것은 ‘변화’가 아니라 ‘변덕’이다. 이것은 성숙한 사고, 지성적인 자세가 아니다.

[전선115호]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은 두 번 나타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희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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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은 두 번 나타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희극으로." 양준호 인천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칼 맑스가 프랑스혁명사를 정치학적으로 다룬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라는 그의 저작에서, 변증법론자 헤겔의 말을 인용하며 역사에 대한 실랄한 비판을 덧붙인 명언 중 명언이다. 맑스는 이 문구를 구사함으로써, 프랑스혁명의 과정에서 나타난 '삼촌' 나폴레옹의 반동적 쿠데타가 '조카'에 의해 반복되는 모습을 이른바 '소극(笑劇)'으로 희화화해낼 수 있었다. 비극이 반복되면 희극이 된다는 것. 이전 노무현 정권이 한미FTA를 밀어붙이면서 국민 앞에 내건 여러 약속들을 그 스스로가 부정했던 것처럼, 지금 정권이 촛불 앞에 맹세했던 가치들은 모조리 자기부정되어 이젠 적대하고 있는 나라와의 지소미아를 무슨 조건부를 내걸며 연장해버린 것 역시, 비극을 넘어선 희대의 희극이다. 게다가 한미일 전문가들의 대부분이 지소미아 연장은 잘 한 것이라 칭찬했다며 자랑하는, 이 희극은 관객의 무료함까지 달래며 공연되는 경쟁력(?)까지 갖춘 소극이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사가 그랬듯, 희극은 주인공 혼자서만 연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극의 역사를 부활시킨 건 대통령 혼자만이 아니다. '촉새' 유시민은 말할 필요도 없다. 조국은 물론이고, 신자유주의의 병폐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했거나, 그 이념을 되레 숭상했거나, 나아가 비극의 부활을 막지 못한 김상조 등의 군상들 모두가 사실 희극의 출연자들이다. 지금도 뻘 짓이나 해대는, 정의당도 포함한 야당 역시 물론이다. 맑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그 탁월한 통찰로 바라본 19세기 중엽의 프랑스 역사는 지금 우리 눈 앞의 '비아그라 헬조선'과 너무나 닮아 있다. 삼촌의 이름을 걸고 집권한 다음 쿠데타로 황제가 되었던 루이 보나파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