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110호] 청년 노동운동의 현 상태 ‘청년 유니온’을 비판 한다.

청년 노동운동의 현 상태 ‘청년 유니온’을 비판 한다.


김태훈(학생활동가)



  청년들이 미래의 노동계급 또는 미래의 산업예비군임은, 미화의 대상이 아니라 착취의 대상임은 사회적 상식이 되었다. 그래서 청년운동도 노동계급 운동의 일부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최저임금 1만원이란 요구가 청년노동자, 아니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의 절박한 요구였음을 보라.

그런데 최임 소폭 인상 조치조차 산입범위 개악 등 각종 꼼수로 저지시킨 문재인 정부, 무엇보다 우리의 친형과도 같은 김용균 동지를 비참하게 살해한 발전자본과 그들의 뒤를 봐준 더불어 부르주아 정권에 대한 분노는 좀처럼 일지 않았고 지금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몇 달 전 까지만해도 경사노위에 기어 들어가자는 반계급적 헛소리가 공공연하게 울려퍼졌다. 청년 노동운동 또한 굴종의 만연에서 벗어난 성역이 될 수 없었다. 아니, '청년유니온' 같은 조직은 우파들의 성역이 되어 민주노총의 추천으로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경사노위에 당당하게 입성했다. 여기에 '비정규직 철폐' 구호에서 "근본주의, 목적과잉"을 발견하는 이남신이 비정규직 대표로, 민주노총의 가부장성을 규탄하며 남성 노동자의 것을 여성 노동자가 빼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여성노조가 여성대표로 끼어들어갔다.

이런 어용들이 당당하게 노동자를 대표한다고 지껄일 수 있었던 건 모두가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한 노동자가 비참하게 죽는 것에 말이다. 전투를 회피하는 관료주의, 평화주의 노선, 동지를 시민으로 '씨'로 부르는 노선에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회주의자들이 이 물결에 맞서 싸우지 않는 것에 말이다.

더 이상 저 더러운 성역에 회피하거나 침묵하지 말자. 어디에서나 있는 청원과 굴종의 정치가 눈총을 받게 하자. 청년 노동운동 또한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는 <청년 유니온과 알바노조, 깊이 들여다보기>에서 이렇게 밝힌다.

"특이한 점은 학력이 높다는 점입니다. 대학 졸업 이상이 89.7%(대학 73.2,%, 대학원 16.5%)로 엘리트 중심의 노조입니다. 대학원 재학 이상 조합원이 15% 정도 된다는 것은 자칫 과거 정당의 ‘쁘띠부르주아’ 운동의 성격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필자의 말처럼 이 운동은 쁘띠적 색채를 강하게 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성원 구성이 쁘띠적이기 때문은 아니다. 집행부의 노골적인 반계급적 노선이 이 조직의 쁘띠성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청년유니온 지도부 일원인 김병철과 나현우의 말을 보며 이들이 어떤 활동을 할 수 밖에 없게 되는지를 보자.

"활동하면서 느끼는 또 하나의 어려움이 있다면, 기성단체들과 같이 행사를 할 때 “청년유니온에는 청년이 많으니 많이 데리고 오면 되겠네?” 이런 말씀들을 하세요. 거절하면 “청년유니온은 자기들끼리만 하네.” 이런 시각도 있고요. 청년을 동원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 거죠. 그래서 이런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입니다. 사업을 할 때 같은 운동의 주체로서 어떻게 잘해볼지, 토론과 고민을 통해 청년유니온의 역할이 보이는 것인데 그런 것 없이 동원의 대상으로만 보면 청년유니온 입장에서도 같이하기 어렵죠. 왜 청년들이 기성운동에 참여하지 않는지 이제는 좀 섬세한 고민과 진지한 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 행복하자_김병철 청년유니온 위원장)

"우리는 한 사회에서 사회경제적 관계를 맺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있습니다. 자영업자의 문제가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의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최저임금을 통해 소득향상을 이루는 것 역시 자영업자들의 매출과 무관하지 않죠.

결국, 자영업자의 문제가 자영업자가 운영하는 일터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문제와 겹쳐집니다. 자영업자가 임금지불 여력을 갖게 하는 것과 노동자가 최저임금을 보장받는 것은 연결돼 있는 문제니까요.

불공정한 경제시스템을 바꾸고 각자의 매출과 소득을 높여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한다는 점에서 자영업자와 청년을 포함한 노동자들은 같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어요. 그 점을 영세사업자, 자영업자 분들이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감대 위에서 소득격차 해소와 이에 수반하는 경제개혁을 위한 우리 사회 각 주체들의 대화의 장이 더 활발히 열렸으면 해요. 서로 싸우는 방식이 아니라 생산적으로 최저임금 인상이 지켜질 수 있도록 함께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청년들 또한 갈등적이지 않으면서 자영업자들이 최저임금을 지킬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겠습니다.“<청년에게 최저임금이란? 청년유니온에게 듣다>


결국 '동원'을 탐탁치 않게 여긴다는 청년 유니온이 '동원' 일반을 거부할 수는 없게 된다. 왜냐하면 "각자의 매출과 소득을 높여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한다는 점에서 자영업자와 청년을 포함한 노동자들은 같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므로 "서로 싸우는 방식이 아니라 생산적으로 최저임금 인상이 지켜질 수 있도록 함께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사회적 대화기구에 '동원'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투쟁을 위한 동원만이 거부된다. 이미 반백년 전에 자신을 배려해주는 척했던 자영업자(소자본가)들에게서 위선의 가면을 발견하고 마침내는 "싸우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오직 삶의 경험을 통해서 깨달았던 우리의 전태일 동지는 이들로부터 얼마나 멀리 전진했던 것인가. 또 이들에게 얼마나 분노했겠는가.

"섬세한 고민과 진지한 대화" 따위야 자본과 그것에 굴종적인 조합원들과는 할 수 있겠지만 자본의 공격 속에서 맹아적인 계급의식, 계급적으로 무식한 청년 유니온이 떠드는 것처럼 자본과 노동의 이해가 일치단결 하는 게 아니라 극적으로 모순되고 화해 불가능함을 깨닫고 있는 노동자들과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경사노위 참여는 얼마나 많은 청년, 비정규 노동자들과의 "섬세한 고민과 진지한 대화"를 통해 결정된 일이었던가? 결국 이들이 말하는 고민과 대화란 실은 조합원들을 달래거나 반계급적 의식을 고취시키는 일일 뿐이다. 이들이야말로 참관료 아니겠는가? 반계급적 '기성운동'의 탁월한 대변자 아닌가?
청년 유니온의 계급협조주의는 현실에서 노골적인 반동적 요구로 이어진다. 한국일보 <경사노위 청년 몫 참여하는 김병철 청년유니온 위원장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기성 노동계와 상반되는 주장도 펼 예정이다. 가령 양대노총이 반발하는 직무급제에 대해 그는 “도입이 시급하다”는 입장을 내놨다. “평생 직장이 갈수록 없어지고 있는데 근속에 따라 임금이 오르는 지금의 호봉제는 더 이상 노동시장 변화 추세에 맞지 않는다고 봅니다. 직장에 새로 진입하는 청년 노동자들이 겪는 (기성 세대와의) 격차 해소를 위해서도 직무급제가 필요하죠. 단, 기성 노동조합에만 양보를 강요할 문제는 아니고 기업과 정부도 합리적 임금체계 개편을 위해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아, 김병철 씨는 얼마나 고뇌가 많았겠는가! 대학원까지 졸업한 수재들이 늙은 노동자들보다도 못한 임금을 받는다니! 어차피 경쟁사회 아니겠는가? 생활투쟁을 그토록 증오한 전태일 정신은 그저 못배운 순진한 생각 아니겠는가? 모든 사업장에서 이 훌륭한 직무급제 시급히 도입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당신의 무지는 알겠으나 청년 노동자들이 겪는 "노동시장 변화 추세"란 자본의 강화된 착취와 분열공작일 뿐이다. 노골적으로 그 '변화추세'라는 것에 굴종하고 노동계급을 세대 갈등으로 몰아넣는 짓보다 청년 노동자들을 자본에게 팔아넘기는 일은 없다. 민주노조의 청년 노동자들은 점차 비정규직과 정규직, 남성과 여성, 청년과 노년 노동자들이 하나의 요구로 싸워야 함을 투쟁속에서 배워나가고 있다. 당신과 비슷한 조합주의, 관료주의 세력들이 이를 계속해서 방해하고 있지만 말이다. 당신이 청년노동자의 대표행세를 하고 심지어는 민주노총의 추천으로 경사노위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우리 운동의 끊임없는 후퇴와 이를 막을 수 없었던 사회주의자들의 무능 때문일 뿐이다.

결국 청년 유니온의 반계급성을 비판하는 것은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청년학생, 청년 노동운동 단위에 대한 비판도 된다. 어떤 사회주의자가 경사노위 참여와 청년유니온이 함께 거론될 때 그들을 계급적으로 비판했는가? 생산현장에서 계급의식을 가진 청년노동자에게 청년유니온의 직무급제 찬성 따위의 주장을 알리고 그것을 비판하는 글을 써보자고 고무했는가? 누구도 그런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것이 극히 어려운 일도 아니며 또 동시에 분명 반향이 있을 만한 일이었음에도 말이다.

청년 단위들은 선전뿐만 아니라 선동과 행동에 있어서도 활동성 부족을 겪고있다. 청년 학생들이 평화적 집회에서 전투적 열정을 복돋는 발언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오히려 관료들보다도 전투적이지 않은 말을 하기도 한다. 한 예로 어떤 알바노조 조합원은 김용균 동지 추모행진 때 그를 예수로 비유하고 문재인 대통령 님께 우리 청년 예수들의 고통을 덜어주십사 간청하는 말을 이어갔었다... 그리고 시민적 격식을 차리는 구호들은 굳이 알바노조까지 가지 않더라도 사회주의 학생 단위들이 조직한 행사에서도 외쳐진다. 활동성의 부족과 기회주의적 관성이 모두를 관통하고 있다.

왜 그런가? 앞서 말했듯이 사회주의자들이 이 같은 운동노선이나 경사노위 청년, 비정규, 여성 대표 같은 노골적 어용분자들에게 신랄한 비판을 가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노선 상에서의 굴종이 실제 활동에 있어서의 동화로 나타난다. 청년유니온, 알바노조와 사회주의 학생단위들이 조직화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은 모두 생산현장과 완전히 동화되지 않은 반은 학생이고 반은 노동자인 층들이다. 아니면 그냥 노동운동 또는 사회주의에 관심있는 학생이다.

결국 지금 사회주의 청년 학생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노동계급 속에 뿌리내리는 일이다. 한 사업장을 전담하고 처음에는 조금이나마 면면이 있거나 투쟁사업장 인터뷰 등으로 알려진 동지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아야 한다. 그 다음에 거기에 있는 젊은 동지들을 소개받는 식으로 또다시 관계를 맺는다. 계속해서 신뢰가 생기면 자본가 국가의 폭력이라던가 우리 운동에 널리 퍼진 반계급적 행태들을 규탄하는 글을 써보자고 고무해야 한다. 그 동지는 계속 활동에 대한 자신감을 얻어가면서 전투적인 투쟁과 사상으로 더욱 이끌릴 것이다. 또는 문필활동보다 투쟁이 선행하여 젊은 사회주의자들이 가장 헌신적으로 싸움을 보여줌에 따라 신뢰를 얻고 사상적으로 이끌릴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학습단위와 계속 공유하면서 실제 계급의식이 어떻게 변하고 어떤 말과 행동을 해야 할 것인지 함께 배워나가야 한다. 이렇게 된다면 학습 또한 더 생동감을 띌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이는 어려운 일이다. 한 학생 활동가가 "투쟁사업장에 가기 전까지는 어떤 말을 해야겠다, 친분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간다. 그러나 막상 가고나면 제대로 말도 안하고 있다"는 경험을 말해주었을 때 나는 무척이나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친분을 쌓는데 성공하였더라도 계급의식이 계속해서 발전하는 것 또한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 동지들도 운동적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닌이 말했듯 열정이 있다면 무엇을 못하겠는가? 역으로 그 정도의 열정도 없다면 무슨 사회주의 활동을 하겠는가? 열정과 분노, 신뢰를 가지고 노동계급 속으로 가자. 사회주의를 현장화 시키자.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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