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110호] ‘맑스 코뮤날레’에는 맑스주의의 혁명적 사상이 있는가?

‘맑스 코뮤날레’에는 맑스주의의 혁명적 사상이 있는가?




여성의 지위는 혁명속에서 실현된다는 피켓 문구를 보라 


 한국에서 2003년부터 격년으로 열리는 ‘맑스 코뮤날레’의 주요 테마는 적녹보(또는 보녹적, 녹보적)연대이다. 이번 2019년 ‘맑스 코뮤날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올해 슬로건은 ‘전환기의 한국사회, 성장과 정체성의 정치를 넘어’이다. 앞선 대회들에서 주목해 온 ‘녹-보-적’ 연대가 교착상태에 빠져있다는 판단 아래, 페미니즘·녹색·노동 운동이 ‘정체성의 정치’를 넘어 연대할 것을 촉구하는 의미를 담았다. 이광일 맑스코뮤날레 집행위원장은 “(슬로건은) ‘녹보적 연대’의 교착상태에 숨구멍을 내기 위한 모색의 자리임을 공표하는 것이며, 동시에 향후 맑스코뮤날레가 그런 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의 더 많은 자발적 참여의 장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소망의 표현”이라고 설명했다.(유정인 기자, 제9회 맑스코뮤날레, 전환기의 한국사회에서 '녹보적 연대'를 다시 모색한다, 경향신문, 2019.05.23.)

그런데 주지하듯 여기서 ‘적’은 노동을 의미하는 것이고, ‘녹’은 생태를 의미하는 것이며, ‘보’는 페미니즘을 의미하는 것이다.이러한 각각의 영역을 이번 ‘맑스 코뮤날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마르크스주의’의 기치 하에서 다뤄보겠다고 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현재적 가치와 실천을 고민하는 이들이 ‘녹(생태)-보(페미니즘)-적(노동) 연대’(또는 ‘적녹보’ 연대)를 변화의 주체로 재차 불러내는 논의의 장을 마련했다.(같은 기사)

그런데 “적(마르크스주의)-녹(생태주의)-보(페미니즘)연대”(적색-녹색-보라색의 연대 ‘주체’를 조직하라, 한겨레신문, 2011-03-2)고 하여 ‘적’은 ‘마르크스주의’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의 현재적 가치와 실천을 고민하는” 이곳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스스로 맑스주의와 ‘녹(생태)’, ‘보(페미니즘)’와 분리되어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곳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맑스주의에는 본래적으로 생태문제와 여성문제(특정한 정치적 조류로서의 페미니즘과 달리 여성문제 일반)에 대한 이해, 인식과 해결책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맑스주의에 결여된 생태문제와 여성문제와의 연대를 추구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인식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진정한 맑스주의자들이 아니다. 맑스주의는 자연과 역사, 인간사회를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변혁시키기 위한 총체적인 사상이다.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에서 보듯, 엥겔스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가정하고 있고 자연과의 조화를 주장하며 인간에 의한 자연파괴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맑스 역시도 <자본론>에서 “지구에 대한 개개인의 사적 소유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사적 소유와 꼭 마찬가지로 불합리한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심하게는 사회전체 · 한 국민 · 동시에 존재하는 사회들의 전체도 지구의 소유자는 아니다. 그들은 다만 지구의 점유자 · 이용자일 따름이며 선량한 가장으로서 지구를 개량하여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적 소유가 인류 전체(더 나아가 동식물까지도)가 대대손손 누려야할 지구라는 생태계를 사적으로 점유하게 한다. 지구에 대한 사적 점유는 지구에 대한 사적인 사용을 가능하게 한다. 지구에 대한 사적인 사용은 오로지 자본의 이윤추구를 위해서만 복무한다. 무정부성과 무계획성을 바탕으로 이윤추구를 본성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야말로 무분별한 자연파괴와 환경파괴의 주범이다.

맑스주의는 이처럼 생태의 문제 역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문제와 관련된 문제로 보고 있으며 그것의 근본적 해결을 추구한다. 맑스주의에 생태문제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연의 법칙을 인식하고 있고, 후대까지의 인간 전체의 이해를 계획적으로, 조화롭게 사용하여야할 터전으로 지구를 간주하고 있다.

맑스주의에 여성문제에 대한 이해는 없는가?


엥겔스는 <공상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의 발전>에서 위대한 공상적 사회주의자 푸리에의 말을 빌려 “어떤 주어진 사회에서 여성해방의 정도는 전반적 해방의 자연적 척도”임을 강조했다.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야말로 여성억압의 역사적 기원을 과학적으로 밝힌 명저이다. 엥겔스는 여기서 가부장제의 출현과 성별분업 역시 잉여생산물에 대한 사적소유의 발전의 결과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여성의 억압과 차별 역시 경제적 소유관계와 긴밀한 관련이 있는 것인바, 자본주의에서 여성억압과 차별도 착취체제를 철폐하지 않고는 근본적 해결이 되지 않을 것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적 인식은 여성억압과 실제적인 차별의 결과물이다. 차별이 있고 차별적 인식이 있다.

오늘날 여성 노동자, 더 나아가 여성이 누리는 법적, 정치적, 생활상의 권리는 대개 노동자 계급이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투쟁해 쟁취한 성과물이다. 이러한 성과물들에 대해 자본은 호시탐탐 빼앗고 박탈하려고 한다. 따라서 여성, 여성 노동자, 모성의 권리는 여남의 프롤레타리아와 인민이 자본과 권력에 대항하여 투쟁으로 지키고 쟁취해야할 과제인 것이다. 이러한 투쟁 과정 속에 남성들의 차별적 인식, 가부장적 인식 역시도 변화발전하고 사라지게 될 것이다.

노자 적대와 노동자 중심성을 부정하는 적녹보 연대


적녹보 연대의 문제는 맑스주의 또는 노동의 문제를 병렬적으로, 동일한 수준으로 분류한다는 것에도 있다. 심지어 이들은 자본 대 노동의 적대를 사실상 부정하고 있기조차 하다.

코뮤니즘의 정치는 이미 해체되어 버린 ‘자본 대 노동’이라는 적대의 선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다 다양해지고 중층화된 사회운동들의 접합을 통해서 ‘적-녹-보라’에 근거한 민주주의의 급진화 전략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박영균, "코뮤니즘의 모색, 노동자계급의 혁명성을 둘러싼 논쟁의 새로운 모색을 위하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자본과 노동의 적대는 "이미 해체되어 버린"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본주의의 중심적 모순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노동자와 자본의 적대는 점점 더 첨예해지고 있다. 부의 양극화와 빈곤과 실업, 공황은 21세기인 지금에도 한층 더 심각하다.

노동자가 자본과의 적대, 이 적대 속에서 만들어지는 자본주의 모순을 해결해나갈 때 이 사회 전체의 모순도 해결해 나가는 단초를 마련할 수 있다. 맑스주의만이 노동뿐만 아니라 생태와 여성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중심적 사상이다. 적(노동)은 녹,보와 병렬적으로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에 있다. 왜 노동(노동자)가 그 중심에 있는가?

노동자는 우선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노동자는 생산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노동자가 담당하는 정신노동, 육체노동이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 노동자가 대부분의 이 사회의 정신적, 물질적 부를 창조하고 있다.

노동자는 생산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이 생산한 정신적, 물질적 부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다. 자본가한테 착취와 억압을 당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자본가로부터의 억압과 착취를 철폐하지 않는 한 근본적으로 해방될 수 없다. 그런데 노동자 계급의 해방은 단지 노동자만의 해방이 아니라 자본의 착취와 억압체제를 철폐함으로써 여타 인민들과 이 사회 전체를 해방시킬 수 있는 견인차다. 그리하여 노동자는 존재조건 상으로 진보적인 계급이고 전체 인민을 해방시키는 중심에 있다.

물론 현실의 노동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계급적 조건과 임무에 걸맞지 않게 이기주의적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그런데 노동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계급적 조건을 인식하고 자신에 대한 억압과 차별과 착취가 자본주의 착취체제의 결과임을 인식하고 싸워나갈 때 진정한 노동자 계급으로서의 계급의식을 획득할 수 있다.

“노동자 계급은 민주주의 투쟁의 전위”여야 한다는 레닌의 주장 역시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전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지적, 정치적 타락의 현상이겠지만, 한국의 ‘맑스 코뮤날레’에는 대개 맑스주의의 혁명적 사상이 결여되어 있다. 자본주의 착취 체제를 철폐하고 노동자 계급과 전체 민중이 해방될 수 있는 혁명적 사상이 없다. ‘맑스 코뮤날레’는 현실의 노동자 인민의 삶을 개선하고 투쟁의 무기가 될 과학적 사상이 사라지고 강단학자들의 현학적 경연의 장이 되었다. 한국의 노동자 계급과 인민이 맑스주의를, 사회를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변혁하는 무기를 다시 획득해야 한다. 이것이 한국의 '맑스 코뮤날레’에게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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